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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적명 |
박사공 7세손 대사간공(휘 열) 산소 |
사적명 |
모계재(대사간공 재실) |
소재지 |
의령군 정곡면 백곡리 시목동 |
소재지 |
의령군 정곡면 백곡리 시목동 |
교통편 |
교통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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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타 |
시향-음력 10월 일 |
기타 |
아버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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烈(열)<박 7世> 1400년~1465년 자는 비승(丕承), 호는 서계(西溪). 1432년(세종 14) 사마시와 1435년 (세종 17) 명경과(明經科)에 뽑히어 승문원정자, 박사, 검열, 전적, 사헌부감찰을 역임하고, 1436년 서장관(書狀官)으로 명나라에 다녀 와서 사간원(司諫院) 정언, 교서, 교리, 헌납, 지제교(知製敎), 사간원 대제교(知製敎), 사간원 대사간(大司諫)에 이르고 1452년(문종 2) 삼로지휘사(三路指揮使)가 되어 민정을 살핀 뒤 급한 일 13가지를 임금에게 알리니 받아들이고 가선대부 판중추원사(判中樞院事)에 특진되었다. 1453년 봉사(奉使)가 되어 명나라에 갈 때 여러 사대부들이 시를 지어 송별해 주었다. 고향 문림에서 고망대(高望臺)가 있는 의령 세간(世干)으로 옮겼는데 그 곳에는 음주도 하고 활을 쏘며서심신을 닦던 계정사(西溪精舍) 터가 있고 지금의 사터이다. 경은 이맹전(李孟專)과 관란 원호(元昊)와 서로 서신을 주고받으며 회포를 풀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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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위 |
숙부인 광주 盧氏(노씨) 총랑(摠郞) 사겸(士謙)의
따님으로 1403년에 태어나 1465년에 돌아가셨다. 묘는 합부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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묘 |
의령군 정곡면 백곡 해좌(亥坐)에 있다. 농석(농石)의 봉고(封高)가 4자이다. 비명은 신재(新齋) 최산두(崔山斗)가 짓고 묘지명은 참의 양희(梁僖)가 지었다. 백곡 감나무골에 모계재(慕溪齋)가 있다. 1991년 봄 묘역을 정화하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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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들 |
敬義(경의) 요절 무후 末同(말동), 蒙同(몽동) 무후 | |
사위 |
崔繼潼(최계동) 흥해인, 문과 급제 함흥 도사 |